부지(敷地)는 불식(不食)이다

김창대(holypsycho@gmail.com), 2020년

1

보증금 오백만원을 올려 달란다. 달랑 문자 하나로 내 목을 죈다. 보이스피싱이면 좋으련만. 문자와 함께 찍힌 이름은 매달 월세를 입금할 때 보던 바로 그 이름이다.
사실 좋은 사람이다. 이만한 방에 이만한 월세면 싼 거다. 사정을 얘기하니 보증금도 깎아줬던 사람이다. 보증금을 올린 건 월세가 두 달 밀렸기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도 이럴 거면 보증금이라도 더 받아둬야겠다는 생각일 것이다.
달희는 탕비실로 가서 김칫물이 잔뜩 든 투명플라스틱 통을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김치볶음과 흰밥의 경계가 조금은 무너져 있다. 1분을 눌렀다. 30초 더 데울까 하다가 말았다. 점심을 먹으러 나간 동료들이 커피를 마시러 오기 전에 어서 먹고 냄새까지 빼두어야 한다.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조금 차다. 그래도 창문 앞에 섰다. 여기서 먹어야 냄새가 덜 날 테니까. 오백, 오백이라…
진동이 온다. ‘어제 니가 사준 치킨 남은 거 데워 먹는 중이다. 고마워, 우리 딸.’ 항암치료 중인 엄마다. 하도 약이 세다 보니 속까지 다 어질어질해서 당최 목구멍을 넘어가는 게 없댔는데, 치킨이라도 넘어가다니 다행이다. 달희의 입꼬리가 웃었다. 매콤한 김치볶음이 조금 달다. 밥통을 비우고 대충 헹궈 자리로 돌아갔다. 회전식 의자가 푸근하다. 회사가 준 자리가 고맙다.
다시 한번 진동이 온다. 은행앱이다. 다행히 입금이다. ‘연말정산 1,500,234원’ 연말정산이 나왔구나. 하지만 밀린 월세 두 달 치와 카드 대금을 합치면 그보다 많다. 그래도 이게 어디야. 그런데 오백, 오백은…

야근 마친 저녁, 인스턴트 미역국에 흰밥 한 그릇을 좌식책상에 올렸다. 한술 뜨려다가 방을 돌아봤다. 행거 하나, 조그만 책장 하나와 서랍장 하나가 둘러있다. 한쪽은 주방이다. 조그만 싱크대 밑엔 조그만 세탁기가, 옆에는 냉장고가 들어있다. 그래도 화장실은 번듯하다. 샤워부스용 칸막이도 있다. 이불만 잘 개어 두면 꽤 넓어 보이는 이 방을, 달희는 뺏기고 싶지 않았다.
‘대출’ 두 글자를 검색창에 넣었다. 카드대출, 모바일대출, P2P대출, 별의별 게 다 뜬다. 뭔가 있을까. 이율이 너무 높겠지. 갚을 수 있을까? 무엇으로 갚아야 할까? 은행이나 카드사에서는 당연히 한도가 안 나올 것이다. 대학 졸업 날, 드디어 점수란 것과 연을 끊을 수 있다 생각했는데, 신용점수란 게 있더라. 인생 끝까지 따라다니더라. 밤샘 알바를 매일 뛸지언정 학자금 대출 말고는 대출 없이 살아온 인생이었는데. 엄마의 암 판정은 달희에게도 새 인생을 선사했다.
‘아, 어떡하지….’
달희는 SNS나 켰다. 사업을 한다는 대학 동기가 가장 많이 올렸다. 리더십에 대한 고인돌에도 새겨져 있을 법한 이야기, 투자자를 만나 좋은 말을 들었다는 이야기, 경제 흐름에 대한 보나 마나 틀릴 것 같은 이야기다. 이 친구는 오백만 원쯤은 쉬울 것 같다. 아기 사진을 올리는 친구들도 있다. 육아에 돈이 많이 든다던데. 새로 나온 전자기기 리뷰를 공유하는 친구들도 있다. 저것들은 얼말까? 어느 출판사에서는 미국을 뜨겁게 달궜다는 소설책을 소개한다.
‘그러고 보니 신춘문예가 곧 있지 않나?’
달희는 급히 ‘신춘문예’를 검색했다. 원고지 80매 안팎, 상금이 칠백만원이다. 원고지 80매만 쓰면 오백만 원을 다 내고도 이백이나 남는단 말이지. 날짜가 열흘 정도 남았다. 두근거렸다. 등단만 하면 보증금도 해결되고, 투잡을 뛸 수도 있게 된다. 달희는 급히 노트북을 찾아 열었다.
화면에 로고가 한참이나 깜빡거린다. 오래된 노트북이라 그렇다. 가만히 기다리자니 마음이 차분해진다. 생각이 정리된다. 달희는 부팅도 다 안 끝난 노트북을 닫았다. 그래, 대학교 5년 내내 실패했으면, 이제 그만할 때도 됐다.
오백은 없다.

토요일 아침. 달희는 동네를 세 바퀴째 돌고 있다. 부동산만 여섯 군데다. 어디부터 들어가 봐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 월세 보증금이 오백만 원이다. 아마 밀린 월세를 까겠지. 이번 달도 밀릴 게 뻔하니, 받을 돈은 410만 원일 것이다. 이사를 하게 되면 용달이라도 불러야 할 테니 400만 원이라고 봐야지. 그러면 들어가서 보증금 삼백에 월세 삼십 짜리를 보여 달라고 해야 한다. 제아무리 통장 잔고를 다 까발려도 꼭 그보다 비싼 방을 보여주고야 마는 사람들이니까.
‘대학생 환영’이라 붙은 부동산을 골랐다. 월세 방이 많을 것 같아서다. 심호흡을 하고 들어가 삼백에 삼십짜리 방을 찾는다고 했다. 공인중개사와 길을 나섰다.
첫 번째 방은 좁았다. 파스텔톤의 최신식 책상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 덕에 누울 자리만 겨우 나왔다. 화장실도 좁았다. 세면대에 샤워기가 붙어있었다. 삼백에 삼십이랬다. 두 번째 방의 넓이는 지금 살고 있는 방과 비슷했다. 하지만 벽지에 곰팡이가 있었다. 바닥의 누런 장판도 십 년은 넘은 것 같았다. 화장실 타일도 하나 깨져있었다. 삼백에 이십오랬다. 세 번째 방은 번듯했다. 지금 사는 집보다 약간 좁았지만, 풀옵션에 수납장도 넉넉했다. 화장실도 깨끗했다. 삼백에 삼십이랬다. 하지만 1층에 고깃집이 있었다. 한 달 동안 소주를 천 원 할인한다는 현수막이 붙어있었다.
네 번째 방은 좋았다. 지금 사는 곳과 전체적인 구조는 비슷했지만, 싱크대와 세탁기와 냉장고가 조금씩 컸다. 최신식 책상도 포함되어 있었다. 화장실도 예뻤다. 살고 싶은 곳이었다.
“여기는 오백에 삼십이에요. 이 정도면 정말 싸게 받는 거예요.”
그럼 그렇지. 달희는 “아,”하고 말을 흐렸다. 공인중개사는 달희 눈빛을 살피더니 말했다.
“오백은 어려워요? 부모님이 조금만 힘써주시면 좋을 텐데.”
공인중개사는 달희를 대학생으로 보는 것 같았다. 대학생 때부터 입던 옷을 입고 나왔으니 그럴 법도 했다. 달희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요즘 학기 끝나고 하는 시즌이라 월세방은 계속 나올 거예요. 다음에 오면 다른 데도 보여줄게요.”
달희는 “예”하고 작게 대답했다. 대학생 때 살던 고시원이 생각났다. 좁긴 해도 지낼 만은 했는데. 싸기도 했는데.

월요일 오전 10시. 주간 회의를 마치고 정리를 하는데 전화가 왔다. 집주인이다. 나가라는 걸까? 월세 밀린 건 뭐라고 말하지? 달희는 서둘러 복도로 나갔다.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한 번 쉬었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네, 201호 사시는 분이죠?”
“네.”
“제가 지난주에 문자 보낸 건 받으셨죠?”
“아, 네, 제가 답장을 안 했네요. 죄송해요.”
“아니에요, 제가 생각해보니까 너무 무례하게 보증금만 올려달라고 한 거 같아서, 미안해서 전화했어요. 저도, 다른 게 아니라, 지금 우리 애가 전세 사는데 그쪽 집주인이 갑자기 오백을 올려달라고 하지 뭐에요? 그런데 제가 또 당장 갖고 있는 현금은 없거든요.”
매월 세입자들에게 받는 월세만도 오백이 넘을 텐데, 무슨 소린가 싶었다.
“네.”
“그래서 부득이하게, 좀, 저도 부탁을 드리는 거예요. 마침 계약 새로 할 때도 됐고, 거기 좀 밀린 것들도 있잖아요.”
“네, 죄송해요.”
“사실 나도 월세 잘 내던 사람이 갑자기 이러면 뭔가 사정 생겼겠거니 해서, 이런 말 하는 거 마음이 좀 쓰이긴 해요.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 보증금 올려주면 월세는 오만 원 깎는 걸로 해요. 아시겠지만 요즘 우리 동네 집값이 많이 올랐어요. 그래서 보증금만 올려도 되기는 한데, 그래도 우리 집에 오래 사셨는데 정이란 게 있는 거니까, 앞으로는 25만 원만 받을게. 이 정도면 괜찮죠?”
달희는 집값을 잘 몰랐다. 그 집값이란 게 왜 오르는 건지는 더더욱 몰랐다. 버스 노선 하나 추가된 게 없고, 공원 하나 생긴 것도 없는데, 낡아만 가는 집들이 왜 가격이 오르는 걸까. 하지만 지금은 상관없다. 월세가 낮아지다니. 이건 희망이다.
“네, 밀린 것도 빨리 낼게요.”
“아, 그건 그냥 됐어요. 계약 새로 하는 거니까 새로 시작하는 걸로 해요. 오백만 이번 달 내로 올려주고. 아시겠죠?”
“정말요? 네, 감사합니다.”
집주인은 전화를 끊었다. 달희는 무얼 감사해야 할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다만, 오백, 오백을 되뇌었다. 오백만 구하면, 밀린 월세도 갚지 않아도 되고, 이사 비용도 아낄 수 있다. 괜찮은 방에서 계속 살 수 있고, 엄마에게 치킨도 더 사드릴 수 있다. 오백만 원만 구하면.

2

오천만 원이 빈다. 비상이다. 영근은 눈에 다시 힘을 잔뜩 주고 화면을 봤다. 주탬담보대출 한도를 넘었다고 한다. 아니, 분명 70%까지 빌릴 수 있댔는데. 마이너스 통장 오천만 원에 주택담보대출 삼억오천만 원에 전세자금 중에 대출 빼고 남은 자금이 일억, 그렇게 도합 오억짜리 아파트를 사는 완벽한 시나리오였다. 다급히 검색을 해본다. 주택담보대출 한도를 설명하는 표 밑에 별표가 달렸다. 부부합산 소득 7천만 원 이하.
“아니, 내가 분명 연봉이 7천이 안 되는데 무슨 소리야. 가만 보자, 내 원천징수영수증이…”
소득 75,061,250원. 그제야 영근은 보너스란 게 생각났다. 망했다. 어쩌지. 아니, 돈을 더 적게 벌어야 대출을 더 할 수 있다는 건 대체 무슨 소리냐. 당연히 돈을 더 버는 사람이 돈을 더 잘 갚을 것이 아닌가. 이런 시장 논리에 반하는 정책은 어느 휘황찬란한 탁상에서 만들어졌을까? 가계대출 증가가 어쩌고저쩌고하는 핑계를 댔겠지. 하지만 영근은 그저 자기 가족이 살 집 한 채를 구하려는 것뿐이란 말이다. 작년에 받은 보너스를 반납해버리고 싶었다.
“자기야,”
영근은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보던 아내를 불렀다.
“왜?”
아내는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오천이… 비는데?”
“뭐?”
“소득이 칠천이 넘으면, 한도가 10%가 줄어든대, 근데 내가 보너스를 합치니까 칠천을 넘게 벌었다네.”
“그럼 어떡해? 이미 계약 다 했잖아.”
“몰라. 어떡하지?”
“오천이 빈다고?”
“10%니까, 오천이지.”
“오천을 어디서 구해, 계약금 내고 남은 게 없다며. 인테리어도 카드 할부로 해야 한다며.”
영근은 이러려고 말을 꺼낸 건 아니었다.
“아니 그러니까, 어쨌든 그렇다고.”
“어떡해, 그럼 대출 더 해야 하는 거야?”
“내가 말했잖아. 지금 대출 잘못하면 주탬담보대출마저 탈락할 수가 있다니까. 지금 나라에서 집 사는데 대출 많이 하는 걸 안 좋아해. 근데 우리가 빌리는 대출은 나라에서 하는 거라 그나마 한도가 많이 나오는 거야.”
“아니, 그럼 어떻게 해. 대출이 안 되면.”
“그러니까 이제 생각을 해봐야지.”
“그러니까 좀 알아보고 했어야지.”
영근은 폭발했다.
“당신은, 당신은 왜 안 알아봤는데? 내가 뭐 나 혼자 살 집 구하는 거야? 우리 가족 같이 살 집 좀 구해보려고 온갖 거 다 알아보고 하느라 머리 아파 죽겠는데, 당신이 뭘 도와줬는데? 쓸데없이 인테리어나 알아보고 있잖아!”
“아니 그럼 오래된 아파트에 들어가는데 인테리어도 안 하고 들어가냐? 그럴 거면 그냥 전세 연장을 하면 될 거 아냐. 뭐하러 집을 사겠다고 나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내가 설명했잖아! 우리가 돈을 모은 다음에 집을 사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고! 내 인생에 가장 집값이 싼 건 바로 오늘이라고! 전세 연장하면, 그 2년 뒤는 어쩔 건데? 생각을 해보라고, 생각을!”
“으아앙, 으아아아앙,”
건넌방에서 아기가 운다.
“아씨, 겨우 재웠는데,”
아내가 있는 힘껏 영근을 째려본다. 그리고 아기방으로 달려갔다.

영근 부부는 결혼할 때 양가에서 도합 칠천만 원을 받았다. 원룸에서 시작했다. 그래도 행복했다. 영근이 정규직이 되면서 전세자금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투룸으로 옮겼다. 아이도 낳았다. 아껴 쓰니 돈이 조금씩 모였다. 삼천만 원을 모았다. 전세 만기도 다가왔다. 혹시나 싶어 부동산앱을 열어봤다. 통장 잔고와 집값 사이는 되려 더 멀어져 있었다. 불안했다. 이대로 간다면, 지금이 통장 잔고와 집값 사이가 가장 가까운 시점일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집을 위해서라면 대출도 마이너스적금인 것은 아닐까 싶었다. 한 채만, 딱 한 채만 마련해두면 된다. 혹여 집값이 떨어져도 괜찮다. 우리 집만 콕 집어 떨어지는 것만 아니라면, 우리 가족 뒹굴 거리다 짜장면 시켜 먹을 공간은 계속 가지고 있는 것이니까.
영근은 잠을 설쳤다. 출근길에 경적 소리를 여러 번 들었다. 커피를 마셔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이대로 가면 야근이다. 영근은 뭐가 됐든 후딱 결론을 내기로 했다.
신용대출 한도를 다시 조회했다. 오천삼백만 원. 다행히 오천보다는 많다. 신용대출을 더했을 때의 DTI(총부채상환비율)과 DSR(총부채원리금상환액)을 계산했다. 나라에서 정해놓은 규제들도 검색했다. 하도 자주 바뀌니 지금 적용되는 수치가 뭔지 찾기가 어려웠다. 또 사고가 나면 안 되니 꼼꼼히 살폈다. 다행이다. 신용대출을 더 받아도 규제에 적용되진 않는다. 그럼 설마 주택담보대출이 승인되겠지. 어차피 신용대출을 안 받으면 집은 못 사는 거다. 그럼 받아야 하는 거다.
영근은 신용대출을 신청했다. 터치 몇 번 만에 입금이 완료됐다.
‘됐다.’
신용대출 만기는 최장 5년. 영근은 단 5년 만에 오천만 원을 추가로 갚아야 한다. 치킨을 끊어야 한다. 육아용품은 중고시장부터 알아봐야 한다. 핸드폰도 효도폰으로 사서 고장 날 때까지 써야 한다. 부모님이 생각났다. 하지만 어차피 오천만 원까지는 못 해주실 것이다. 처음부터 길은 하나였다. 퇴로는 없었다.
대출 심사 결과는 한 달이 다 되도록 나오지 않았다. 최장 40일까지 걸린다는 공지는 있었다. 하지만 영근에겐 너무 길었다.

평범한 날. 영근은 회사에서 엑셀 파일을 검토하고 있었다. 오전까지 끝내야 하는 일이었다. 모르는 번호로부터 전화가 왔다. 받지 말까 하다가 통화버튼을 잘못 눌러버려서 서둘러 귀에 댔다.
“안녕하세요, 주택금융공사 전, 혜, 진, 이라고 하는데요, 김영근씨 맞으시죠?”
뭐지? 왜 전화가 오지? 영근은 서둘러 복도로 나가며 답했다.
“네, 맞는데요.”
“주택담보대출 신청하신 내용 확인했는데, 지금 심사 중인데 잘못된 것을 발견해서요.”
“아, 실수가 있었나요?”
“그게, 지금 버팀목 전세자금대출을 일억오천만 원 이용 중이신 거로 나오는데요, 그 대출이 정책적으로 되는 거라 집을 사게 되면 즉시 상환을 하셔야 하거든요.”
“네?”
“근데 상환 예정 대출에 그게 표시가 안 되어 있어서요.”
영근은 잘 이해가 안 됐다.
“버팀목전세자금대출도 주택금융공사에서 하는 거라서요, 선생님 같은 분들은 바로바로 추적되거든요. 일억오천만 원 상환 예정인 거 맞으시죠?”
영근은 말도 안 되는 말을 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네, 상환 예정이긴 한데, 그 이사 가는 날 갚을 거라서, 대출이 먼저 나오고 나서 갚을지도 몰라서요. 그래도 상환 예정으로 표시할 수 있나요?”
“네, 하루 단위로 체크되니까 시간까지는 상관없습니다. 그럼 상환 예정으로 표시해드릴게요. 더 궁금한 거 있으세요?”
“아니요.”
“네, 그럼 행복한 하루 되세요, 지금까지 전, 혜, 진이었습니다.”
짧은 신호음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 영근은 되려 차분해졌다. 조용히 일어나 복도로 나갔다. 천천히 걸었다. 이제 일억오천만 원을 한 달 동안 빌려야 한다. 이미 은행 한도는 꽉 찼다. 어디 한도가 남았더라도, 더 빌리면 주택담보대출에 실패한다.
“인생, 재밌네.”
영근은 카톡을 썼다. ‘자기야. 우리 전세자금대출은, 우리가 집을 하나 가지는 순간 갚아야 한 대. 그런데 우리가 인테리어 때문에 집을 먼저 사잖아. 그러니까 내년 1월 5일부터 2월 4일까지, 한 달 동안 일억오천만 원이 있어야 하는 거야. 자기가 장인어른이든 오빠든 연락해서 칠천만 구해봐. 딱 한 달이야. 나는 우리 부모님께 연락드릴게.’
영근은 전화를 걸었다.
“엄마, 잘 들어봐, 내가 이번에 집을 사잖아,”

3

집값이 일 년 만에 오억이 올랐다. 매주 시세를 확인하는 엄마가 전화로 호들갑을 떤다.
“어머, 주이야. 축하해~ 세상에, 이번 주에 드디어 오억을 채우네. 일 년에 오억이면 정말 남는 장사 아니니. 정말 4년 내도록 찔끔찔끔 개 영역 표시하듯 오르더니 말이야. 그 요새 애들 존버라고 하지, 존버. 우리 딸이 존버에 성공한 거 아니니. 정말 축하해~”
“아니, 엄마. 내가 살아야 하는데 집값 오르는 게 무슨 소용이야. 세금만 오르지. 맞다. 그럼 이제 9억 넘어가는 거 아냐? 그럼 세금 왕창 오르지 않아?”
“얘는, 넌 가만히 앉아서 오억을 벌었는데 세금 걱정밖에 안 해? 엄마는 이렇게 기분이 좋은데.”
“대졸 직장인 초봉 빤한 거 알잖아. 그럼 엄마가 세금 좀 내주던가.”
“아유, 그래! 엄마가 아빠한테 말해볼게! 아빠도 기분 좋아서 세금 몇십만 원은 금방 해주실 거야.”
“엄마, 농담이야. 이제 세금은 내가 내야지.”
“어머 어머? 부자 되더니 철까지 들었네. 그러니까 네 오빠도 집 사라고 할 때 좀 샀으면 얼마나 좋아? 괜한 고집 부려 가지고, 이번에 전셋값만 올려주게 생겼잖아.”
“아, 그래?”
“아니 집주인이 그냥 연장해줄 것처럼 연락도 없이 가만히 있더니, 갑자기 오백만 원을 더 내라는 거야. 그 동네 오르면 얼마나 올랐다고.”
“그래서 어쩌기로 했어?”
“생각해보니까, 이번에 우리 건물에 월세 계약 끝나가는 사람이 있길래, 보증금 오백만 올려달라고 했어.”
“그럼 엄마나 오빠네 집주인이나 똑같은 거 아냐?”
“똑같기는! 오백 올려주고 딱 거기 맞춰 월세 깎아주기로 했는데? 거기다 밀린 것도 그냥 안 받기로 했어. 진짜 엄마 같은 집주인이 어디 있냐? 그걸 복인 줄 알아야 하는데 말이야.”
“그래, 우리 엄마가 부자 치곤 참 착하지.”
“얘는. 그래도 우리 딸 집값이 올라서 엄마가 기분이 너~무 좋다! 다시 한번 축하한다! 잘자!”
“그래, 엄마도 잘자.”
그러게, 오빠도 집을 사지는. 어차피 전세도 다 엄마 돈으로 했으면서. 주이는 새삼 집을 둘러봤다. 방 셋에 화장실 둘. 혼자 살기에 넓긴 하다. 엄마가 요즘은 여자가 신혼집이 있어야 착하고 성실한 남자 꼬셔다 살 수 있다면서 골라 줬다. 주이는 어차피 탈세 목적인 걸 뻔히 알았다. 그래도 거절하진 않았다. 친구들 모아서 파티할 때 좋겠다 싶었으니까.

생각해볼수록 기분이 좋아졌다. 10억 대의 자산가가 된 느낌말이다. 주이는 백화점에 가기로 했다. 명품 매장 들어갈 때 좀 더 척추를 꼿꼿이 하고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통장에 입금된 건 한 푼도 없다. 6월이면 더 빠져나갈 것이다. 그래도 부자니까.
백화점에 들어섰다. 음이온 가득한 공기와 LED 빛 파장이 포근했다. 깨끗하게 청소된 타일들을 밟으며 걸었다. 그러다 목걸이 하나가 눈에 띄었다. 목걸이가 반짝였다. 주이의 눈도 따라 반짝였다. 가격표를 흘깃했다. 오백만 원. 쉽진 않다.
‘월세 낸다 생각하고 할부로 질러볼까? 안 그래도 목걸이 하나가 단단히 꼬여서 못 쓰게 됐는데…. 지난번에 빽 하나 산 것도 이번에 할부가 끝나니까….’
주이의 눈빛을 읽었는지 점원이 다가온다.
“고객님, 착용 한 번 도와드릴까요?”
사뭇 공손한 목소리가 마음에 든다. 아무래도 사야 할 것 같다.
그때, 가방에서 진동이 왔다. 송이다. 주이는 점원에게 예의 바른 손짓을 하고 전화를 받았다.
“어, 송이야, 웬일이야?”
“웬일은 무슨, 우리가 사연 있어야 연락하는 사이니? 백만 년 동안 연락이 없길래 내가 또 걸었지.”
“미안, 지난주에는 회사에서 좀 바빴어.”
“집값이 오르느라 바빴던 건 아니고?”
“누가 그래?”
“누구긴 누구야. 우리 엄마가 그러던데? 오억이 올랐다며. 축하해~ 엄마 잘 만나면 오억도 쉽게 쉽게 버는구나. 부럽다, 얘.”
굳이 떠벌리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돈 많은 거 소문나서 좋을 일은 별로 없으니까.
“엄마는 왜 쓸데없는 얘길 해가지고. 어차피 내가 살 집이잖아. 세금 오르는 거밖에 없어.”
“세금 걱정하는 거 보니 자산가 다 됐구나? 이제 곧 건강보험료 걱정도 하겠네.”
“야!”
“농담이야. 영어유치원부터 20년 지기 친구로서, 정말 정말 축하한다, 주이야.”
“알았어, 고마워. 근데 이거 어디 가서 말은 안 해줬으면 좋겠어. 내 통장엔 한 푼도 안 들어오는 거 알잖아.”
“얘는, 알았어, 알았어. 그럼 나만 알고 있을 테니, 밥이나 한 번 사라.”
“알았어, 또 연락할게.”
주이는 전화를 끊었다. 찝찝했다. 송이가 나만 알고 있겠다고 하는 말처럼 못 믿을 말도 드물다. 며칠 내로 주이의 지인 모두가 이 소식을 알게 될 것이다.
직원이 상냥한 미소를 유지한 채 주이를 보고 있다. 아, 목걸이. 주이는 목을 살짝 앞으로 뺐다. 점원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목걸이를 채워준다. 그리고 거울로 비춰준다.
‘예쁘네, 맘에 들어.’
하지만 이내 주이는 더 복잡한 생각을 했다. 이 브랜드 가격대야 모두가 알 터. 목걸이를 하고 나가면 속으로 계산 한 번씩은 해볼 것이다. 그럼 그걸 눈치챈 송이가 목걸이 예쁘다로 시작해서 집값까지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겠지. 허벅지를 꼬집어댄들 이미 늦을 것이다.
“예쁘네요, 다른 데 더 보고 올게요.”
“예, 둘러보시고 또 오세요.”
‘사지 않겠습니다.’라는 말을 예의 있게 주고받은 다음, 주이와 점원은 헤어졌다.

주이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라디오에서 패널 둘이 싸운다.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하는 바로 그곳에 집을 공급해야 집값이 떨어지죠. 그러려면 지금 규제로 다 묶어놓은 것들을 풀어야 해요. 과감한 해제를 통해서 집을 공급해야 합니다. 수요공급의 법칙은 시장의 진리라니까요.”
“그렇게 집이 빽빽이 들어서면 집값이 떨어질 거라고요? 아뇨, 그곳만 인프라가 더 좋아지고, 그곳만 기업들이 더 몰리고, 그곳만 사람들이 더 몰리고, 그래서 수요는 더 오르고, 이때다 싶어 투기꾼들이 더 가세해서 집값만 더 폭등할 겁니다. 뭐 재개발하면서 대기권이라도 뚫을 겁니까?”
“시장의 논리를 무시한 정책은 필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난 정권에서는 공급이 있으니까 집값이 안정된 거고, 이번 정권은 공급을 해도 이상한 변두리 지역에서만 하니까 집값이 오를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상한 변두리 지역이요? 그 지역 사시는 분들을 폄훼하는 발언입니다. 당장 사과하세요. 집값이 오른 건 그냥 수요가 아니라 투기수요 때문입니다. 지난 정권의 정책들이 투기수요를 만들어 낸 거고요.”
나이 지긋한 택시기사가 주이를 흘끗 본다. 말을 꺼낸다.
“뭐가 됐든 집값 빨리 잡아야지. 안 그래요? 나도 은퇴했는데 자식들 집값 땜에 대출 내느라 이 짓거리 하고 있는 거거든. 일평생 고생해서 내 집 하나 장만했더니 이제 또 자식들이 문제야. 뭔 놈의 집값이 참.”
주이는 할 말이 없다. 동조할 수도 없다. 애써 말을 꺼낸다.
“자식들 때문에 고생이 많으시네요. 저희 부모님도 저 때문에 고생이 많으세요.”
다행히 집까진 그리 멀지 않다. 주이는 최대한 라디오에 집중하는 척했다.

주이는 아파트 정문에서 내렸다. 상가 1층에 부동산이 있다. 오랜만에 부동산에 붙은 종이를 봤다. 10장도 넘게 붙어있다. 이사 갈 사람들이 많은가 보다. 가격들이 주이가 이사 올 때와는 확연히 다르다.
‘잠깐, 내가 사는 호수만 오억이 올랐으니까…’
17개 동에 동마다 15층씩, 층마다 4~5집은 사니까, 대충 1,000집은 넘을 것이다. 오천억이다. 사람들이 평화롭게 일 년 동안 살고, 오천억이 생겼다.
집값은 누가 올리는 걸까? 라디오의 패널이 말한 것처럼,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하는 수요가 공급을 초과한 탓일까? 여기 이렇게 매물이 많은데. 아니면 투기꾼들이 올리는 걸까? 투기꾼들이 올리면 올라가는 걸까? 적어도 주이는 투기를 하지 않았다. 실제로 살고 있고, 계속 살 거니까. 그리고 집값이 오르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집값은 올랐고, 주이는 기분이 좋다. 당분간은 그럴 일이 없겠지만, 주이가 이사를 가게 된다면 주이도 들어왔을 때보다 오억은 더 받을 것이다.
주이는 평소처럼 집에 들어가 평소처럼 씻고 평소처럼 침대에 누웠다. 5년은 된 침대다. 주이는 침대도 갑자기 비싸진 것만 같았다.

4

강남대학교 경영학과 10주년 동창회. 달희는 오백만 원을 빌리러 왔다. 영근은 다른 사람은 집을 어떻게 샀을까 궁금한 마음을 가지고 왔다. 주이는 친구들을 보러 왔다.
달희에게는 오만 원이란 회비도 큰 돈이었다. 입을 옷도 마땅찮았다. 하지만 돈 빌릴 데가 5년 만에 만나는 대학동기들 뿐이었다. 다행히 10주년 동창회라 오랜만에 온 게 달희뿐은 아니었다.
분위기 있는 식당에 촌스러운 현수막이 붙었다. 일찍 온 사람들이 서로를 반가워한다. 하지만 뻔한 인사와 안부 몇 마디 나누고는 정말로 반가운 사람들을 찾아가기 바빴다.
“어? 달희야! 오랜만이다.”
영근이 달희에게 인사했다. 달희는 영근의 옷차림을 살폈다. 영근에게는 오백만 원이 있을까?
“아,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잘 지냈지. 요즘 애 키우느라 정신이 없어. 퇴근이 퇴근이 아니에요. 너는 어때? 잘 지내?”
“응, 잘 지내. 요즘 회사가 영 바쁘네. 넌 회사 다니면서 애까지 키우니 힘들겠어.”
영근은 스위치라도 눌린 듯 육아 이야기 시작했다. 아기가 새벽에 깨면 얼마나 힘든지, 아기 이유식을 만드는 건 얼마나 힘든지 하소연했다. 달희는 이야기를 꺼낼 틈을 살폈다. 잘 보이지 않는다.
“어? 영근이네, 올해도 왔구나.”
대수가 다가왔다. SNS에 사업 이야기를 올리는 친구다.
“아, 대수야. 사업은 잘되고 있어?”
“아직 준비하고 있지. 근데 아이템이 대박이야. 부동산을 지분으로 나눠서 주식처럼 거래하고 수익을 내는 건데, 너 집값 떨어졌다는 얘기 들어봤냐?”
“들어봤지. 0.1% 떨어졌다고 아주 죽을상을 하는 기사들. 오를 땐 몇십 퍼센트도 오르면서.”
영근이 답했다.
“그렇지? 바로 그거야. 부동산을 가지고 거래하면 항상 상한가다, 이거야.”
“근데 그거 가능한 이야기야? 법적으로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거 같은데.”
“그걸 가능하게 만드는 게 사업의 영역이지, 인마. 경영학과 나온 애가 왜 이래? 요즘 규제프리존 이야기도 많이 나오고, 외국에도 기회가 많아. 너 한 오백만 원쯤 투자할 생각 없냐?”
달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수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이 사업은 성공할 수밖에 없거든. 상장까지 되면 대박이다. 몇십 배는 기본으로 불어날 수 있어. 그냥 오백만 딱 넣어놓으면 나중에 집 한 채 생기는 거라고.”
“규제프리존 찾아서 겨우겨우 해야 하는 사업이 무슨 상장이야. 나중에 런칭하면 알려줘. 들어는 가 볼게.”
“너, 나중에 진짜 후회한다.”
지금이다. 달희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했다.
“영근아, 오백 있으면 저런 위험한데 돈 버리지 말고. 나, 나 좀 빌려주라. 내가 이자는 꼬박꼬박 쳐줄게. 너 나 알지? 취직하고 2년 만에 학자금 대출 다 갚아버린 거.”
“아, 내가 최근에 집을 사려고 해가지고, 지금 현금은커녕 대출만 산더미야.”
다시 한번, 달희는 용기를 냈다.
“아, 그래? 진짜 금방 갚을 수 있는데.”
“이미 계약이 끝나서 곧 돈이 다 나가야 해.”
겨우 꺼낸 말이 그냥 흩어졌다. 하필 집 때문이라니. 하지만 달희는 멈출 수 없었다. 최대한 밝게 말을 이었다.
“대수 너는? 잠깐 노는 사업 자금 없냐? 투자 많이 받았다며.”
“아, 아, 근데 그 투자란 게, 바로 입금이 되는 게 아니더라고. 그게 일단 약속들을 하고 사업 진행되는 거 보면서 그렇게 그러는 거라, 나도 지금 대출만 많아, 대출만.”
달희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정말들 돈이 없는 걸까? 하긴, 달희가 이런 얘기를 들었어도 껄끄러워 그냥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포기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했다. 답은 달희가 내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동창회 식순은 형식적이고 짧았다. 몇 병의 술이 도느냐가 동창회 성공의 기준이 아니던가. 누구는 어색함에 누구는 반가움에 술잔을 부딪쳤다. 술이 쌓여 흥을 올렸다.
달희는 회비 5만원부터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뷔페식에 술도 무제한이랬다. 오랜만에 뷔페다. 양껏 먹고 더 먹었다. 술도 양껏 마시고 더 마셨다. 말이 빨라지고 목소리가 커졌다. 대학 시절엔 못 보던 모습이었다. 달희와 함께 있던 영근과 대수도 덩달아 마셨다. 시답잖은 소리에 웃음이 시원했다.
몇 잔이나 마셨을까? 달희가 잠시 조용했다. 그러더니 소리를 빽 질렀다.
“야!!! 나 오백만 원만 빌려줄 사람!!!”
달희가 식당을 꽉 채웠다. 일순간 조용해졌다. 영근이 말렸다.
“달희야, 너 취했어.”
“취했든 말든! 나 오백만 원만 빌려줄 사람!!! 아무나 좀 빌려줘 봐아! 나 필요하단 말이야!!! 나 빚 잘 갚아!!! 나아, 학자금 대출 2년 만에 갚은 사람이야! 혼자 갚았다고, 혼자! 부모님이 한 푼도 안 줬는데 혼자! 그러니까 나 좀 빌려줘! 이자 쳐줄게! 많이 쳐줄게!”
정적이 조금 더 이어졌다. 덕분에 누군가의 말이 또렷이 들렸다.
“아이, 참. 기분 잡치게. 무슨 동창회에 돈을 빌리러 와.”
“야! 뭐라고? 하, 참. 동창회에 돈 좀 빌리러 오면 안 되냐? 그게 뭐 위법이야? 몇 조 몇 항인데!”
이번엔 다른 데서 더 큰 소리가 들려온다.
“아니 이 좋은 날 왜 그런 얘기로 분위기를 망쳐? 여기 전세 냈어?”
“이제껏 다 같이 떠들어 놓고 뭘 조용히 하래! 그리고 난 좋은 날 아냐. 돈 없어서 전세도 못 내! 그러니까 오백만 원만 빌려달라니까아! 오백만 워언!”
영근이 달희를 잡았다. 데리고 나갔다.
“야, 왜 이래? 내가 뭐 못 할 말 했어? 여기 회비만 모아도 몇백은 되겠다. 나한테 오백 빌려주는 게 그렇게 어려워? 그렇게 하나같이 어렵냐고!”

달희는 식당 앞 벤치에 앉았다. 엉덩이가 차갑다. 찬바람을 맞고도 여전한 술기운에 정신이 아득하다. 하지만 조금 전에 무슨 짓을 하고 무슨 소리를 질렀는지 또렷이 기억났다. 차라리 술을 더 많이 마실 걸 그랬다. 그럼 기억도 안 날 텐데. 이제 동창회는 마지막이다 싶었다. 이사도 가야겠다. 락스 두 통이면 곰팡이는 없어질 것이다. 처음부터 그럴걸. 무슨 욕심에 여기까지 왔을까?
영근이 편의점에서 오천 원짜리 숙취해소음료를 사 왔다. 달희는 고맙다는 말도 못 하고 받아서 쭉 들이켰다. 울렁인다. 영근에게 고마움이 더 큰지 미안함이 더 큰지 고민했다.

그때, 달희의 눈에 흐릿하게 주이가 등장했다. 둘을 뒤따라 나온 것이다.
“어? 여기 있었네!”
“아, 주이…”
“달희야, 괜찮아? 내일 연락할까 하다가, 전화번호 바뀌었을까봐 지금 나왔어. 니가 아까 안에서 했던 이야기 말이야,”
달희는 제발 주사로 생각하고 무시해줬으면 싶었다. 그걸 진지하게 들었다면 더 창피한 건데. 주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혹시 그 오백만 원 내가 빌려줄까?”
여전히 아득한 술기운 속에서, 달희는 조금 전에 포기한 걸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는 게 싫었다.
“내가 있잖아, 얼마 전에 목걸이를 하나 봤는데, 그게 너무 사고 싶은데 참았었거든. 근데 그게 마침 딱 오백만 원이야. 신기하지? 아까 네 얘기 듣는데 딱 그 생각이 나는 거야. 그러니까 네가 그 목걸이를 할부로 사서 나를 주면, 내가 너에게 오백만 원을 줄게. 나도 당장 오백이 있는 건 아닌데, 엄마한테 현금으로 사면 할인해준다고 하면서 달라고 하면 될 거거든. 어쨌든 그럼 너는 오백만 원이 생기고, 나는 목걸이가 생기고. 대박 아니냐? 나한테 더 연락할 것도 없이 넌 카드 할부만 갚으면 돼. 그거 12개월인가까지는 무이자 할부도 될걸? 어때, 진짜 대박이지?”
주이는 신나기라도 한 것 같았다.
달희는 울컥했다. 자신의 목을 죄는 오백만 원이 주이에게는 목에 거는 목걸이가 된다는 게 짜증났다. 자기는 오백만 원 때문에 곰팡이 가득한 집으로 이사를 가야 하는데, 주이는 오백만 원은 엄마에게 간단히 달라고 할 수 있는 돈이라는 게 화가 났다. 달희의 연체된 카드에 나올 리가 없는 오백만 원이라는 한도가, 주이 카드에는 무이자할부로 쉽게 긁히는 돈이란 것도 싫었다. 특히 주이가 짓는 미소가 분했다. 시혜성(施惠性) 행복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특히 저 보조개가.

퍽.
달희가 주이를 때렸다. 주먹으로.

주먹이 채 떨어지기 전에, 달희 눈에 경찰이 보였다. 근처를 순찰하던 경찰이었다. 우연, 참 독하다.

이름 다달희. 폭행 혐의자. 돈 없음. 빽 없음. 목격자 있음. 합의금이라도 나오면 고시원으로 이사 가야 함. 구속되면 동시에 해고되어 앞날을 알 수 없음.
이름 김영근. 목격자. 돈 없음. 남은 대출 한도 없음. 조사가 빨리 끝나기만 바라고 있음. 늦게 가면 아내에게 혼날 텐데 무슨 핑계를 둘러대야 하나 고민 중.
이름 지주이. 피해자. 통장에 돈 없음. 아빠 개인 변호사 있음. 호의를 무시당해 기분이 매우 나쁨. 합의로 끝내기엔 맞은 자리가 너무 아프다고 생각 중.
그런데 모두가 돈이 없다. 왜일까?

[작가노트]

이사를 하려고 한다. 온라인 부동산을 많이 훑었다. 오프라인 부동산도 몇 군데 갔다. 주변의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모두 자기가 가진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보다 조금 더 좋은 집을 원한다. 돈이 적든 많든 똑같다. 그래서 모두가 가능한 힘껏 대출을 한다. 혹은 가능한 힘껏 월세를 낸다. 그래서 모두가 버겁다. 모두가 돈이 없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돈이 적든 많든 마찬가지다.

부동산만큼은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수요는 가구당 하나로 인구증감에 비례할 따름이고 공급은 어차피 땅덩어리에 제한되기 때문이다. 다만 욕망과 달성의 법칙이 적용된다. 땅덩어리가 제한되고 욕망에 끝이 없는 한, 가격에도 끝이 없다. 집값을 잡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자기 집값만 빼고 잡히길 원한다. 혹은 자기가 집을 살 수 있을 정도만 잡힌 뒤에 자기 집값만 빼고 잡혀있길 원한다.

누구나 살고 싶어 하는 바로 그곳에 누구나 살고 싶어하는 면적과 품질의 집을 공급하면 된다는 말은 허구다. 강남 한복판에 바벨탑을 지을지언정, 다들 조금이라도 더 넓은 집을 가지려 다툴 것이다. 

이런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존경 받는 바보가 되거나 호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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